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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서울씬기행] 학생회관 지하실에서 꽃 피운 자립의 맹아

DATE. 2021.03.12.

서울씬이란? 서울은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다.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거미줄처럼 이어진 지하철을 통해 서울 구석구석을 오간다.

어떤 학자는 경기도와 의정부 인근을 합쳐 ‘대서울’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서울 주변의 위성 도시들이 서울 생활권과 밀접하게 연결된 점을 감안한 제안이다.

서울은 한국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때로는 한국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서울씬이란 ‘서울’이란 지명과 장소, 순간을 의미하는 ‘씬scene’을 합쳐서 만들어낸 조어이다.

서울에서 무너지고 사라지고, 또 생겨나는 공연장, 펍, 카페, 전시장, 영화관 등을 이 서울씬이라는 의미 구조 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클럽 대공분실

홍대 앞 칼국수집인 두리반이 벌인 거대 건설사와의 싸움에서 생겨난 음악 조직 –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두리반 보러가기]

싸움에서 이겼지만 정작 두리반에서 공연 활동을 하던 인디 음악인들은 공연 장소를 잃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은 사실 모든 임대차 관련 싸움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면, 그동안 본거지로 사용했던 그 공간은 허물어지는 결과가 나오고 만다. 승리 = 해산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때문에 한번 임대차 관련 싸움에 관련된 사람들은 승리의 현장을 떠나서 다음 싸움의 장소로, 또 다음 싸움의 장소로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용역의 폭력과 욕설, 경찰서 연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자신들의 첫 번째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나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캠퍼스에 있는 학생회관 지하실 ‘클럽 대공분실’이 그것이다. 이름부터가 거창하다. 대공분실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경찰청 보안국이 설치했던 기관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조사했던 곳이다.

공연장에 이런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게 된 배경에는 한예종이 2007년까지 옛 안기부 건물을 사용했던 과거가 자리 잡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의 소문으로는 귀신이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한예종 동아리 연합회는 기자재 등을 쌓아 놓는 용도로 썼던 지하실에서 달빛역전만루홈런을 추모하는 음악회를 진행했는데 이때 자립음악생산조합과 연을 맺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예종 학생들이 어떻게 해서 인디씬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예종 학생들은 농성장과 집회 현장에서 자립음악생산조합 사람들과 꾸준히 교류했다. 당시 2인조 펑크 듀오로 주목을 받았던 무키무키만만수도 멤버 둘 다 한예종 출신이었다.

또 유기농맥주, 이랑, 한받과 같은 한예종 출신 뮤지션들이 활동했다. 이랑은 영화감독이자 가수이며 한받은 자립음악생산조합이란 아이디어를 처음에 발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장기하와 브로콜리 너마저, 붕가붕가레이블과 같은 서울대 출신들로 이루어진 인디 음악인들이 홍대 한쪽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것처럼, 한예종 학생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홍대 인디와 교류했다.

물론 여기서 학벌주의를 조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학교 내의 동아리 형태로 시작했던 레이블이 인디씬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처럼 학교 내에 위치한 공연장에서 시작한 자립의 물결이 당시 새로운 음악 경향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적을 뿐이다.

클럽 대공분실은 영어 약자로 DGBS로 불렸는데 이는 펑크록의 성지 드럭이 DGBD로 불린 것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은 공연 연습 공간, 공연 공간, 녹음 공간을 필요로 했다. 때문에 한예종 학생들과 마음을 맞춰 클럽 대공분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한예종 학생들은 외부 사람들이 학교에 들어오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는 후문이 있다. 더군다나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임대차 관련 농성장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현재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유명무실해진 단체가 되었다. 클럽 대공분실도 문을 닫았고, 자립음악생산조합이 근거지로 사용했던 꽃땅, 로라이즈, 조광사진관(자립본부)도 사라졌다. 때문에 더 객관적으로 이 모임에 관해 논해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은 확실히 정치적 색깔이 강한 집단이었다. 한쪽에서는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음악가들이 존재했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운동권에 속하는 사람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주축 중 한 명이었던 단편선은 운동을 하는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기도 했다.

애초에 이들이 탄생하게 된 두리반이라는 공간 자체가 정치적인 곳이었다.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진보성향의 당원들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립음악생산조합이라는 새로운 인디씬이 정치적 색깔을 가지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당시 홍대 앞의 상황, 또 현재의 홍대 앞의 상황을 돌아보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홍대 앞은 상권이 날로 커지고 있어서 연남동, 합정동까지 월세가 급등했다. 이에 따라 많은 클럽들이 문을 닫고 인디 음악인들이 설 자리는 사라지고 있었다.라는 것이 보편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홍대 앞 클럽들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호황이었던 시절이 없었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과거 드럭에서 조선 펑크가 발호했던 시절에는 드럭에 들어가기 위한 줄이 몇백 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FF와 같은 클럽은 상대적으로 장사가 잘 됐다. 하지만 클럽 빵, 클럽 쌤, 에반스, 프리버드 같은 보통 클럽들은 평일에는 사람 한 두 명, 주말에는 열댓 명 정도가 들어차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군다나 이 씬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인디 음악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이들은 애초부터 페이를 받지 않고 무대에 섰다. 공연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대관을 해서 기획 공연을 하는 것인데 100명 이상의 관객을 들이지 못하는 밴드라면 그만큼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인디 뮤지션들에게는 언제나 젠트리피케이션이었고,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다. 무대에 설 수나 있으면 다행이지 대부분의 밴드들에게는 클럽 무대에 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농성장에서의 공연은 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설 무대를 마련했다는 의미에서 뜻이 깊었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자신이 설 자리가 없었던 뮤지션들이 두리반이라는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 뭉치게 되었지만, 결국 언젠가는 터져 나올 아우성이었다.

홍대에서 두리반처럼 쫓겨나는 클럽이나 공연장들은 부지기수다. 굳이 두리반이 아니었더라도 살롱 바다비를 살리기 위한 네버다이 바다비 공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디 음악인들은 뭉쳐서 활동할 기회를 언제나 엿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예종이었을까. 한예종이라는 학교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인들을 길러낸다, 도 한몫을 했다. 또 당시 한예종만이 아니라 전국 대학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학생들의 자살 사건들이 의미하는 바도 컸다.

지금은 더 상황이 열악해졌지만 2010년대 초반에도 대학생들이 미래에 대해 갖고 있는 불안은 컸다. 특히 예술 계열 학생들은 고질적인 저임금과 착취에 가까운 혹사를 겪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학생들이 농성장에서 연대를 하거나 자립음악을 하는 사람이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움직임에는 분명한 한계점이 있었다. 이들의 음악은 기존의 클럽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음에 가까운 것이거나 아주 시끄러운 성격의 음악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자립음악생산조합의 다양한 음악 스펙트럼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이들이 기존 운동권 조직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기성세대들은 ‘투쟁’에 적합하지 않다거나 조합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공연을 거절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이 공연하는 장소는 가장 첨예한 싸움이 벌어지는 농성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은 음악을 연주하는 형태에도 영향을 끼쳤다. 좋은 사운드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 4인조 풀밴드는 드물고 기타와 드럼만으로 연주를 하는 밤섬해적단이나 404, 무키무키만만수와 같은 형태가 주를 이루었다.

또는 혼자서 통기타 하나만으로 연주하는 뮤지션들이 사운드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덕분에 공연에 자주 서기도 했다. 사운드 시스템을 오히려 파괴하는 노이즈 음악 뮤지션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클럽 대공분실은 대학교에서 인디 밴드 공연장을 학내에 세운 최초의 사례이자 아마도 마지막 사례로 남을 듯하다. 클럽 대공분실은 자립음악생산조합이 유명무실해진 후에도 학내 공연장으로서 기능하다가 지금은 완전히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이름부터 독특한 이 공연장은 새로운 젊은 피의 움직임을 마음껏 발산했던 곳이었다. by 벨레 매거진

 

클럽 대공분실

사진 출처 : 클럽 대공분실 기관지 식스틴, 클럽 대공분실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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