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뭐볼까] 제주도 푸른 밤의 느와르 – 벨레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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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오늘뭐볼까] 제주도 푸른 밤의 느와르

DATE. 2021.05.11.

[영화 <낙원의 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몇 가지 의문점들은 남아있다. 이 복수극이 꼭 반전을 내포하고 있어야만 했는가. 또 다른 종류의 복수극을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 지나치게 안이하지 않았나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제주도의 푸른 밤 속에서 고통을 되새기는 주인공들의 모습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낙원의 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느와르 물, <낙원의 밤>의 주인공 박태구는 조폭이다. 영화는 그의 누나와 조카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누나와 조카를 잃은 태구는 상대 조직, 북성파의 보스를 칼로 무참하게 공격한다. 조직의 배려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를 하게 된 태구는 일주일 정도 제주도에 머물기로 한다. 한때 러시아에서 날렸다는 쿠토라는 무기 밀매상과 시한부 판정을 받은 조카가 그를 맞아들인다.

한편 태구의 칼에 당했던 북성파의 보스는 불구가 되었지만 살아있었다. 북성파의 2인자인 마이사는 태구를 없애는 조건으로 조직 간의 일을 마무리하는 데 동의한다. 제주도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던 태구에게 북성파의 마수가 뻗어온다.

주인공 박태구 역할을 맡은 배우 엄태구는 영화 <밀정>에서 하시모토 역으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목이 쉰듯한 허스키한 목소리에 강인해 보이는 마스크, 액션에 최적화된 장신을 가졌다. 이 영화에서 엄태구는 시종일관 쫓고 쫓기는 액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모습은 주연을 맡았던 이전 영화 ‘판소리 복서’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유흥업소 기도일을 했던 때와 오버랩된다.

판소리 복서에서 도핑을 해서 선수 자격이 박탈당한 후에 보여주는 숫기 없는 모습은 이번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태구의 캐릭터는 시종일관 자신만의 멋에 취해 있다. 그럼에도 <낙원의 밤> 클라이맥스에서 피칠갑이 된 모습으로 자신의 보스인 양사장에게 머리를 부딪히는 광경은 <판소리 복서>에서 그로기 상태까지 얻어맞고도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과 비슷해 보인다.

태구의 평상심을 흔드는 여주인공 재연은 삼촌이 밀수해온 권총 사격을 연습하며 시간을 보낸다. 재연은 무수한 연습 속에서 어느새 명사수가 되어 있다. 그녀는 태구가 보는 앞에서 마치 자살할 것처럼 머리에 총구를 대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은 발사되지 않는다. 태구는 종잡을 수 없는 재연의 행동에 당황하며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든다.

영화 <죄 많은 소녀>를 통해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해 드라마 <멜로가 체질>, <빈센조>를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전여빈은 마치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주인공처럼 군다. 전여빈은 영화 내내 무표정을 짓다가 물회 앞에서는 반색하며 “이거거든”이라며 입 한 가득 집어넣는다.

혹자는 이 영화가 기타노 다케시가 오키나와에서 찍은 폭력물 <소나티네>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영화 소나티네는 오키나와의 맑은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피를 뿌리는 야쿠자 영화다. 쨍한 햇볕 속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다케시의 모습은 <낙원의 밤>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제주도의 야자수가 있는 밤 풍경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진지한 극 진행 중간중간에 들어가는 유머 코드를 봐도 다케시의 작품들이 떠오르는 건 마찬가지다. 태구와 재연이 대사를 주고받기가 무섭게 널린 빨래를 두드리며 끼어드는 펜션 집주인 여자의 모습은 너무나 뜬금없는 장면이지만 말이다.

영화에서 유머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캐릭터는 마이사를 연기하고 있는 차승원이다. 차승원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고 있는 코미디 영화들은 그가 살벌한 조폭 연기를 하는 와중에도 어딘가 우스운 구석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영화에서 마이사는 과장된 욕설을 퍼부으며 상대의 내장을 꺼내 보이겠다고 장담하지만, 태구와의 약속은 끝까지 지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문식이 부패한 경찰 박과장 역으로 출연해 양사장과 마이사 사이를 중재하는 장면은 분명히 느와르물임에도 투캅스나 공공의 적 시리즈로 극을 끌고 가는 느낌이 있다. 때문에 이 부분도 한국식으로 재구성한 기타노 다케시의 <아웃레이지> 시리즈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게 한다. 야쿠자들이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공포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지만 정작 다케시의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죽어나가는 <아웃레이지>는 비정상적인 유머 감각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박훈정 감독의 의도가 만약 다케시의 재연이라면 이 영화는 그 목적에 충실하게 봉사했을까. 답은 절반의 성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폭력은 무자비하고 노골적이며 시차를 두지 않고 몰아닥친다. 여기까지는 다케시의 영화 미학에 닿아있다. 하지만 뜬금없이 등장하는 한국식 유머 코드는 영화와 잘 붙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케시의 영화가 단순한 야쿠자 영화가 아니라 그만의 특색을 가진 느와르물로 완성되었지만, 박훈정 감독의 시도는 또 하나의 조폭 영화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친구’를 통해 한국 영화계에 서브 장르로 뿌리내린 조폭 영화는 등장인물을 미화할 것인가 아니면 사실 그대로의 잔인함을 보여줄 것인가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어 있다.

출세작 <신세계>에서 미화된 조폭 사이의 우정과 잔인한 결말을 동시에 그려 보였던 박훈정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잔인함 쪽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낙원의 밤>이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또는 ‘NO SAFE HAVEN(안식처)’이라는 포스터의 카피가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이 영화는 철저하게 계산을 주고받는 조폭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마이사가 그렇게 약속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은 폭력에는 꼭 그에 합당한 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조폭의 논리를 체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이사는 자신의 보스인 도회장이 당한 폭력의 몫으로 꼭 태구의 목숨을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대응하는 이유는 피에는 피로, 칼에는 칼로 빚을 갚는 논리가 성립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서다.

즉 마이사의 ‘선’은 마치 저울의 눈금과도 같다. 한쪽의 살이 더 많이 도려내 졌다면 반대쪽의 살도 그만큼 도려내야만 한다는 것이 마이사의 ‘선’이다. 만약 이 법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조폭이 아니라 ‘양아치’다. 마이사는 여러 번 양사장을 양아치라고 부르며 이 법칙을 상기시킨다. 그의 마지막 대사, “아저씨한테 계산할 게 남아있었구나”도 이와 같은 마이사의 성격과 영화 내부의 논리를 상기시킨다.

태구와 재연 사이의 러브스토리는 어떻게 된 걸까. 재연이 태구에게 먼저 잠자리를 요구하긴 하지만, 이는 해프닝일 뿐, 둘은 포옹도 손잡기도 키스도 하지 않는다. 재연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과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인 삼촌의 문제에만 집중한다. 태구 역시 비명횡사한 자신의 조카와 누나의 죽음에 짓눌려 있다. 둘의 운명은 미래가 없다.

애초에 둘 다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맞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에서 지겹게도 반복되는 연애사는 이 영화에서만은 예외다. 둘은 음울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펼쳐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

이 연애 없음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미덕인 동시에 영화가 조폭영화에서 느와르로 건너가지 못하게 막는 요소이기도하다. 박훈정 감독은 남자 간의 브로맨스도, 남녀 간의 로맨스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정해진 끝이 있고, 그곳을 향해 무작정 달려 나갈 뿐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몇 가지 의문점들은 남아있다. 이 복수극이 꼭 반전을 내포하고 있어야만 했는가. 또 다른 종류의 복수극을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 지나치게 안이하지 않았나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제주도의 푸른 밤 속에서 고통을 되새기는 주인공들의 모습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by 벨레 매거진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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