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레welle] 뉴웨이브의 시대 – 벨레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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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벨레welle] 뉴웨이브의 시대

DATE. 2021.06.04.

SF를 단순한 공상과학 소설에서 사변소설로 변모시킨 뉴웨이브. 이 흐름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전후 영미권 문학을 변화시킨 주역이다

벨레 매거진의 ‘벨레(welle)’는 물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WAVE다. 흔히 뉴웨이브라고 하면 영화 용어로 생각하기 쉽다. 1980년대 대만의 새로운 영화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만 뉴웨이브 영화’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예술 영화감독으로 손꼽히는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이 바로 뉴웨이브에 속한다.

영화학적으로 보면 프랑스아 트뤼포나 장뤽 고다르 같은 1950년대에 등장한 프랑스 신인 영화감독들을 뉴웨이브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뉴웨이브는 칭찬보다는 멸칭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뉴웨이브란 용어는 음악계, 미술계로 진출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뉴웨이브는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SF(Science Fiction)의 사조를 말한다. SF, 한국어로는 공상 과학 소설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이 소설들은 1960년을 기점으로 이전의 색채를 떨쳐버린다.

뉴 웨이브의 이전 시기를 흔히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하드 SF, 스페이스 오페라 같은 SF를 대표하는 작풍이 유행하고, 위대한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다. 이 시기에 SF의 3대 그랜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A. 하인라인과이 등장했다. 따지고 보면 현재 일론 머스크가 화성에 가겠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이 황금시대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천문학이 발달하기 전 시대에는 화성에 운하가 있어서 화성인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이에 따라 화성 이야기를 다룬 수많은 SF 작품들이 쏟아졌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연대기’가 있다. 이 작품은 화성에 관한 단편을 모아 놓은 작품집이다. 인간이 화성에 진출하여 화성인을 모두 없애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 이 시기에는 일론 머스크의 화성 계획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테라포밍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다.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행성의 기후환경을 변화시켜 인간이 정착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든다는 개념이다. SF를 알지 못하고서는 왜 일론 머스크가 화성에 가고자 하는지, 또 그의 꿈에 미국인들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알 수 없다. 한국인의 눈에는 로켓을 마구 폭발시키면서 돈을 허공에 뿌리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미국인의 눈에는 현대 미국 대중문화에 뿌리를 깊게 내린 화성에 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인물이다.

이 황금시대가 지나고 나서 뉴 웨이브 시대가 도래했다. 황금시대의 SF를 자연 과학 법칙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규정한다면 뉴 웨이브의 SF는 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등 인간의 내면이란 새로운 우주를 탐사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과학 소설이라는 의미를 버리고 이 시기의 SF를 speculative fiction – 사변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변소설이란 용어는 SF를 어린아이들을 위한 펄프 픽션에서 보르헤스 같은 환상주의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들의 모던한 작풍까지 아우르는 장르로 만들었다. 인류학적 사고방식을 SF에 도입한 어슐러 르귄, 인간의 내부 심리를 세계의 위기로 묘사했던 J.G.발라드, 언어학을 SF에 접목한 새뮤얼 딜레이니, 인간을 능가하는 초인을 통해 판타지와 SF를 종횡무진 달렸던 로저 젤라즈니와 같은 작가들이 뉴웨이브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가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SF는 흔히 말하는 문학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SF는 펄프픽션의 하나로 여겨졌는데, 펄프 픽션은 2차 대전 이전 시기에 대중문화 잡지를 만들었던 질이 나쁜 싸구려 종이에 인쇄된 소설을 가리킨다. 흥미 본위의 소설로 자극적인 소재를 지향했다.

뉴웨이브의 작가들은 펄프픽션으로서의 SF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이전의 SF가 중요시했던 ‘경이감’을 외부 우주가 아니라 내부 우주, 인간의 마음속에서 찾으려 했다. 이러한 경향의 초창기 작가인 J.G. 발라드는 재앙 연작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전통적인 과학 소설이 세계의 멸망을 자연과학적으로 다루었다면 발라드는 이를 인간의 심리극의 일환으로 변화시켰다.

발라드를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 ‘뉴 월즈’의 대표 작가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마이클 무어콕이다. 그의 일종의 선언적 움직임에 감화되어 미국의 SF 작가들도 새로운 방향의 SF를 창작하기 시작한다.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고 대중성이 높기로 유명한 로저 젤라즈니는 그리스 로마 신화, 불교 신화, 인디언 신화 등을 SF에 접목하여 초인물을 써냈다. 그의 대표작은 불교와 힌두교의 신들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미래인들 간의 전투를 그린 ‘신들의 사회’다. 이 작품은 순수 문학을 방불케 하는 감각적이고 세밀한 묘사와 함께 신화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인물 조형을 더해 이전의 SF가 가닿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이 소설에서 신의 행세를 하고 있는 미래인의 모습을 보면 아서 C. 클라크 경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실제로 로저 젤라즈니의 창작욕은 SF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컬트적인 요소와 플라톤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판타지 소설 ‘앰버 연대기’는 그가 지향하는 미래 묘사가 마법과 구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현대에 살고 있던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혈통의 비밀에 따라 ‘원세계’ – 앰버로 접어들게 된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바로 어슐러 르 귄이다. 그녀는 어스시 시리즈와 같은 판타지 작품들로도 유명하지만, 헤인 시리즈라고 불리는 ‘어둠의 왼손’ ‘빼앗긴 자들’과 같은 걸작 SF를 통해 미국 문학의 판도를 바꿔버린 인물이다.

어둠의 왼손은 페미니즘 작법을 SF에 도입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게센인은 26일을 주기로 성별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들에게는 남자스러움도 여자스러움도 잠시 거쳐가는 변화의 연속성상에서만 파악된다. 겨울이 계속되는 행성인 게센에서 인류 공동체의 특사 겐리 아이는 오직 자신의 지성만으로 외계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로저 젤라즈니의 라이벌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새뮤얼 딜레이니는 언어학과 기호학의 사피어-워프 가설을 스페이스 오페라의 패러다임에 접목한 ‘바벨-17’이란 소설로 유명하다. 이 소설에서 외계의 침략자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미래 세계에 알 수 없는 암호 ‘바벨-17’이 수신된다. 주인공은 ‘바벨-17’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전 우주의 운명을 건 모험을 떠난다.

이처럼 다양한 인문학을 SF의 세계관과 융합시켰던 뉴웨이브 SF는 이후 사이버펑크와 슬립스트림에 영향을 주게 된다. 사이버펑크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라는 작품을 기점으로 하여 영화 매트릭스 세계관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SF의 서브 장르이다. 슬립스트림은 대중 문학인 SF와 순수문학 사이의 경계선 상에 존재하는 중간적인 작품을 가리킨다.

SF를 단순한 공상과학 소설에서 사변소설로 변모시킨 뉴웨이브. 이 흐름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전후 영미권 문학을 변화시킨 주역이다. 최근 중국인과 아프로 아메리칸, 여성들이 SF의 주요 상을 휩쓰는 걸 보면 전 세계의 문학 흐름을 변화시켰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혹자는 뉴웨이브란 문학 운동이 60년대 이후 정지했고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그 유산은 영화나 게임 같은 형태로 우리 삶 근처에 도달해 있다.

이 흐름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꾼 위대한 실험이었다. 벨레 또한 그 흐름의 일부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해본다. 인간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개념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물건일 수도 있다. 이 물건에 개인의 취향이 접목되면 그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인간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는 브랜드, 벨레가 지향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닐까. by 벨레 매거진

 

사진 출처 – 언스플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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